일어나자마자 캐리어 짐을 정리한다.
하도 여기저기 호텔을 옮기면서 난민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미니멀리스트가 되어가는 것 같다.
훈련소 군장싸는 것보다 훨씬 빨리 짐을 쌀 수 있게 됐다.
아침을 먹으러 1층에 내려오니, 어마어마한 종류의 올리브와 치즈가 진열되어 있다.
이 나라에선 아침 상에 올리브와 치즈가 없으면 불법인 걸까?
나는 육식주의자이기 때문에 햄과 소시지를 잔뜩 받았다.
물론 그린올리브는 내 최애 터키음식 중 하나다.
꿀을 벌통째로 가져다 뒀다. 태어나서 이렇게 먹는 꿀은 처음본다.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뭔가 클라스가 있어보여 한 컵 받아본다.
꿀벌들의 피와 땀이 느껴지는 달달함이다.
아침을 먹고, 이즈미르에서 80km 떨어진 셀축이라는 작은마을로 향했다.
셀축에는 에페스라는 유적지가 있는데,
에페스는 그리스 로마 시절에 지어진 마을이 남아있는 유적지다.
뭔가 일반적으로 터키에 그리스 로마 유적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궁금해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셀축 근처에 다다르게 되면 이렇게 도로변에서 주스를 파는 노점상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국도에서 찐옥수수랑 참외를 파는 느낌이랑 비슷하다.
나르 수유(석류 주스)를 파는 곳이 있어서 잠깐 차를 세우고 한 번 마셔보기로 했다.
더듬더듬 어설픈 터키어로 나르 수유를 달라고 했는데, 사람 무안하게 능숙한 영어로 대답하신다.
글래스로 할지 보틀로 할지 결정하란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글래스는 깨질까봐? 보틀로 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석류를 사정없이 꺼내더니 압착기에 집어 넣는다.
알고보니 글래스는 한 컵이고 보틀은 한 병이란 뜻이었다.
하긴 뭘 기대한거야..? 이런 바보같은
석류를 열댓 개 박살내더니 드디어 석류주스 한 병이 완성됐다.
100% 석류 주스를 1리터나 짜내다니.. 이 건 한국에서는 강남 사모님들이나 되어야 마실만한 초호화 음료다.
멍청하게 한 병을 시킨 것을 후회하며 과연 얼마를 부를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가격이 15리라(1350원)라고 한다. 무조건 이틀 내에 마시라는 팁도 까먹지 않는다.
말도 안되는 과일가격에 충격을 먹은 상태로 한 모금 마셔보니, 시럽을 넣은 것처럼 달달하다.
아니, 혹시 여기선 시럽이 과일보다 비싸서 시럽 넣는게 손해려나..
이쯤되니, 우리나라에서 먹는 생과일 주스는 과일 향이 나는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그렇게 설탕넣어 팔면 사람들한테 맞아죽을텐데..
참고로, 석류주스 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주스들도 굉장히 저렴하다.
그리고 터키에서 주스라고 하면 무조건 그 자리에서 생과일을 착즙해서 주는 것이 기본 때문에, 사 먹을 수 있다면 매일 주스를 사 먹어서 돈을 벌도록 하자?
어느 새 도착한 셀축마을.
마을 규모가 작기 때문에, 에페스 유적지를 제외하면 딱히 볼 것은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마을 중심부에서 에페스 유적까지는 차로 10분 정도가 더 걸린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매표소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느 관광지들처럼 길가엔 기념품 상점과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입장료는 에페스 유적외에 다른 부대 시설을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다양하다.
나는 다른 부대시설은 별 관심이 없어서, 에페스 유적지만 보는 입장권을 250리라(22,500원)에 구매했다.
코시국에다가 셀축이 외진 곳이다 보니, 관광객들보다 고양이가 더 많은 느낌이다.
여기 고양이들은 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개냥이들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만져달라고 몸을 부빈다.
한국에서처럼 고양이의 환심을 사기위한 츄르따위는 필요없다.
어렸을 적,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책에서나 보던 건축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가 터키라는 걸 잊게 만드는 광경이다.
이 모든 유적들이 2천 년 전에 세워진 건물들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굴러다니는 기둥 조각 하나하나가 신비스러워 보인다.
이 길은 과거 동로마제국 시절, 에페스마을과 바닷가를 이어주던 큰 대로라고 한다.
동로마의 인싸들이 걷던 대로를 똑같이 걸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걸어다녔을 것 같은 동선으로 똑같이 이동해보자.
이 고양이는 배터리가 다되어 전원이 꺼졌는지, 인사를 해도 미동조차 없다.
극장이 굉장히 큰데도 가운데 무대 쪽에서 사람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또렷히 들린다.
잘은 모르지만, 똑똑한 로마인들이 소리가 퍼져나가는 형태를 계산해서 극장을 설계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이 어마어마한 돌들은 대체 어떻게 옮겨온 걸까.
아직 볼게 많으니 다른 공간으로도 이동해 보자.
무엇을 사진으로 담아야 할지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유적들이 너무 많다.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켈수스 도서관이다. 서기 1세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천장과 벽면에 새긴 음각장식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이 한 땀 한 땀 돌을 파 나갈 때 2천 년 뒤 후세가 다시 볼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당시 동로마 사람들이 살던 주택가로 들어왔다.
도서관이 앞구르기 세바퀴 반 거리에 있고, CGV(원형극장)가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미친 위치에, 대문의 클라스로 보아 부자들이 살던 동네인 것 같다.
뭐라고 쓰여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돌에 새긴 글씨들도 2천 년의 시간동안 잘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제국은 고양이제국에게 패망해서 모든 집을 고양이에게 빼앗겼음이 틀림없다.
집집마다 고양이들이 살고있다.
이렇게 건물로 커버를 씌워서 계속 발굴하고 있는 공간도 있다.
보아하니, 주택 내부의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있는 유적인 것 같다.
발굴된 식기도구라던가, 집 안의 벽화, 목욕탕등을 그대로 볼 수 있다.
HBO에서 만든 미드인 ROME을 본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드라마에서 나온 로마의 생활상이 현실처럼 오버랩되어서 기묘한 기분까지 든다.
어느 가정집 벽에는 그날 저녁에 장볼 음식들의 이름과 가격도 쓰여있었다.
마치 2천 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다.
재밌는건, 이런 그리스 로마 유적지가 터키에서는 너무 흔하다 보니, 일부지역에선 도시 개발이 골치아플 정도라고 한다. 건물 좀 지어 보려고 땅을 파기만 하면 유적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셀축 마을 주변을 돌아다녀 보면 풀밭에 로마 건축양식의 돌기둥이 그냥 굴러다닌다.
그러다보니, 에페스도 사실 유적이 좀 많이 모여 있으니까 관광지처럼 만들어 준 것 같다.
터키는 여러모로 참 축복받은 땅을 갖고 있구나.
이제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갈 시간이다.
올 때랑 다르게 한 방에 이스탄불로 가야해서 500km 가 넘는 거리를 운전해야 한다.
셀축에서 이스탄불까지는 사실 터키 전체로 보면 먼 거리라고 할 수 없는데,
터키 땅덩어리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까, 실제 거리는 굉장히 멀다.
돌아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휴게소 식당인데도 분위기가 레스토랑에 온 것만 같다.
시킨 건 양고기 바베큐 하나인데, 여러가지 에피타이저들이 나온다.
여기도 결제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각 테이블마다 번호가 적혀있는데, 식사를 한 후에 입구 쪽에 있는 마트캐셔에서 테이블 숫자를 말하고 결제 할 수 있다. 생각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이다.
영수증을 받아보니 식사비로 78리라(7000원)가 나왔다.
그냥 한국 안 돌아가고 여기서 좀 더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갈 길이 멀기에 차에도 밥을 먹여주고 다시 이스탄불로 향했다.
그런데 이 날,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낮에 예약한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잠수를 탄 것이다.
밤 열시에 도착하는데, 저녁 8시까지 아무 연락이 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일단 에어비엔비에 나온 호스트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봤다.
전화를 받자마자 끊어버린다. 그리고선 문자가 오는데, 자기는 예약신청을 수락하지 않았단다?
그럼 대체 누가 수락을 했다는 건지, 나보고서 직접 예약을 캔슬하라는 미친소리를 한다.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해 그냥 그 호스트를 공개하려고 한다.
이럴 때는 절대로 숙박자가 캔슬을 해주면 안된다. (풀환불이 안됨)
무조건 호스트 잘못이기 때문에, 호스트가 직접 캔슬하지 않으면 에어비앤비에 컨택해서 환불처리해야한다.
하필 감기기운이 심해져서 운전도 힘겹게 하고있는데, 또라이 호스트를 만나서 더 죽을 맛이다.
일단 차를 세우고, 에어비앤비 고객센터를 찾아봤다.
아놔, 터키에는 에어비앤비 지사가 없어서 미국고객센터로 연락을 해야 한단다.
설상가상으로, 터키 여행자 유심은 해외발신이 되지 않아서, 한국 유심을 끼워 놓은 세컨 폰으로 미국 에어비앤비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해외에서 해외로 거는 로밍통화라서 요금폭탄이 터질테지만, 미친 호스트 때문에 너무 짜증나서 내 돈이 얼마나 나가던 말던 그 호스트에게 응징을 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미국 에어비앤비 고객센터는 사람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이것 저것 물어보더니, 호스트에게도 연락을 해 본다고 홀드를 걸어놓는다.
사실 상담원한테 다시 전화를 내 쪽으로 걸어달라고 말을 했다면 전화비가 나가지 않았을텐데,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분이 넘는 통화를 했지만, 즉시 해결은 되지 않았고, 추후 진행상황과 결과를 에어비앤비 메세지로 보내준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몸은 아프고, 아직 갈 길은 멀고, 머릿 속은 복잡해서 터질 지경이다.
일단 지금 시간에 다시 에어비앤비를 잡기는 글렀고,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일단 아무호텔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예상보다 늦어진 열시 반 쯤에 이스탄불 카디쾨이에 도착했다.
차를 Otopark에 주차하고 바로 앞에 있는 로컬호텔을 들어갔는데, 이 호텔은 정말 최악의 날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더 최악의 호텔이었다. 추가 피해자를 막기 위해 호텔을 공개한다. 이름은 Glorina Hotel.
깔끔해 보이길래 들어갔는데, 뭔가 리셉션 분위기부터가 느낌이 이상했다.
리셉션 여직원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리셉션 밖에 있는 껄렁한 남자애가 어설픈 영어로 여직원을 도왔다.
여직원한테 찝적대러 온 놈인지, 여기서 진짜로 일을 하는 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하룻밤에 200리라(18,000원)라길래 카드를 내밀자, 남자애가 나킷 나킷 거린다.
톨게이트에서 현금내는 곳을 두리번 거리다 나킷이란 단어를 배웠기 때문에 나킷이 현금이라는 말이라는 걸 배웠었다.
여기가 무슨 시장바닥도 아니고, 현금을 달라고 하는 것부터가 정상적인 호텔은 아니었지만, 몸 컨디션이 너무 최악이라, 다른 데로 갈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방에 올라가니, 이불도 없고 비누랑 샴푸도 없다.
1층에 내려가 말을 하니 그제서야 이불과 비누를 갖다 준다. (이불은 빨았을까 모르겠다.)
그러면서 인심쓰듯이 헤어드라이기도 복도에서 따로 꺼내어 갖다준다.
문을 닫으려는데 이 놈이 안나가고 손가락을 비빈다. 팁을 달라는 얘기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지만, 다 때려치고 얼른 쉬고 싶어서 10리라를 주고 문을 닫았다.
씻고 누우니, 창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온다.
문이 열렸나 싶어 커튼을 제끼고 창문을 확인하니 분명히 창문이 닫혀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들어오는 바람인지, 우풍이 이렇게 심한 방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심지어 난방조차 되지 않아, 갖고 있는 옷을 최대한 껴입고 누웠다.
그런데도 밤새도록 오들오들 떨면서 기침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최근 기침이 잦아들며 회복세에 접어든 듯 했는데, 이 날 최악의 호텔을 가는 바람에 한 순간에 말기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돈을 준다고 해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인생 최악의 호텔이다.
어차피 쉬지도 못할 곳, 해가 뜨자마자 짐을 챙기고 도망치듯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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